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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1850년대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있는 시기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 인 ‘마거릿 가너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하지만 흑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노예제도 배경의 여타 소설들이 그렇듯이, 빌러비드는 단순한 흑인-선인과 백인-악인 구도를 띄지 않는다. <빌러비드>에 이름이 가진 백인은 총 4 타입의 백인이 나오는데, 그중 3 타입의 백인이 오히려 주인 공 세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저자인 토니 모리슨이 의도하는 바가 노예 제도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토니 모리슨은 소설을 출간한 해, 뉴욕 타임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다.
''Slavery is very predictable,'' she said. ''There it is, and there's some stuff about how it is, and then you get out of it or you don't. It can't be driven by slavery. It has to be the interior life of some people, a small group of people, and everything that they do is impacted on by the horror of slavery, but they are also people.'' 'Compassion Is Too Sloppy(이 소설은 노예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노예제는 매우 예측 가능합니다. 그런 제도가 있고 그것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들이 있고, 그다음에는 거기서 벗어나거나 벗어나지 않거나 할 뿐입니다. 노예제만으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의 내면적 삶에 대한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노예제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사람일 뿐입니다. 글로 쓰기엔 분노는 너무 시시하고 연민은 너무 질척거리는 감정입니다.)'
노예제도는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빌러비드>에 등장하는 이름 있는 백인들은 ‘학교선생’을 제외하고는 기존 노예제도에서의 흔한 백인 주인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백인 등장인물들의 전형성을 제거하였지만, 이 ‘predictable’한 제도에 서의 기득권자들이 완전히 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여전히 파악할 수 있는 증거를 작품에 남겼다.
전형적인 악역인 ‘학교선생’을 제외한 이름 있는 백인 캐릭터 중 가장 작품 등장인물들에게 영향 이 큰 인물은 주인공 세스가 탈출할 때,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와준 백인 소녀 에이미 덴버일 것이다. 에이미 덴버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픈 일이니깐.”(42)을 말하고, 그 이름은 세스의 딸인 덴버에게로 계승된다. 에이미의 선행은 다수의 백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태도라, 신시내티의 다른 흑인들이 세스의 말을 믿지 않아 그녀를 경계하는 하나의 이유 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에이미의 행색의 묘사를 보면 쉽게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에이 미 덴버는 다른 백인들과 같은 기득권층이 아니다. 에이미는 누더기를 입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쇠고기와 국물이 필요한 사람’이고 농원에서 탈출하여 보스턴으로 도망치는 신세이다. 그녀는 학교 선생보다는 세스의 처지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에이미는 또 작품 내에서 ‘네다섯 사람 머리를 다 합친 것만큼 무성한 머리숱’을 가졌다고 묘사되었는데 이를 통해 에이미의 인종이 아일랜드인 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이리쉬들은 흑인들처럼 뻣뻣하고 성긴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이유로 백인 들 사회 내에서 ‘하얀 흑인(White Niggers)’라고도 불리며 차별받는 민족들이었다. 즉, 에이미가 세 스에게 행한 선행은 백인이 흑인을 배려했다는 것보다 같은 흑인들의 연대와 유대에 더 가까운 행위인 것이다.
‘하얀 흑인’이라고 볼 수 있는 에이미 덴버와 달리 세스와 베이비 석스의 전주인이자 ‘스위트홈’ 농장주인 가너 부부는 확실한 기득권층이다. 하지만 가너 부부는 다른 백인 농장주들과 달리 흑 인 노예들을 존중하고 심지어 흑인 노예들을 인간 취급하여 남성 노예들을 ‘사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름도 지어주며 교육도 시키려 하고, 쉬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며, 여성 노 예가 강간당하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고, 노예가 자신의 몸값을 지불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그 치지 않고 몸값을 지불한 노예를 위해 정착금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나온 에이미의 선행의 이유가 낮은 계급이기에 흑인 노예와의 공감과 유대인 것과 반대되게 자신의 권력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작중 내 가너 씨가 남성 노예들을 사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이웃 농장주는 가너 씨에게 검둥이들은 사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시에 흑인 남성들은 성욕이 왕 성하며 이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편견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가너 씨는 이웃 농장주의 우려에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방의 남성성에 대한 조롱으 로 응한다. 이를 통해, 가너 씨가 다른 농장주들과 다르게 남성 노예들을 사내 취급하는 것은 노예 들을 남성 취급한다고 자신의 남성성에 타격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의 사례에서도 사회적 약자들과 가장 대립하는 집단은 기득권의 최상위층이 아니라 최하위층임을 복기하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2010년대 말 한국에 페미니 즘이 대두되면서 젊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가장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4~50대의 중장년층 기득권층이 아니라 20대의 젊은 남성들이다. 마찬가지로 최저임금을 상승하는 것에 공 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건물주가 아니라 자영업자들이다. 또, 일제시대 때 농민들을 직접적으로 핍박한 마름들 역시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친일파들이었다. 최상위층 기득권은 사회적 약자들의 약간의 지위 상승으로 인해 받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고, 피해가 올 거라는 생각 역시 없기 때 문이다. 즉 가너 씨의 선행의 원인은 기득권층의 여유라고 볼 수 있다. 작중 내에서도, 가너 씨가 죽고 난 후, 가너 부인만 남게 되어 압도적인 권력의 차이와 남성성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자 가너 부인은 학교 선생과 그 제자들을 스위트홈으로 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스위트홈에서 노예 대 상으로 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베이비 석스가 정착하고 세스가 사는 신시내티 124번지의 집주인 에드워드 보드윈은 작중 등 장한 모든 백인 등장인물 중 가장 흑인에게 우호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 사람이고 베이비 석스, 세스, 덴버, 3대에 걸쳐서 일자리를 주선했으며 세스가 자신의 딸 빌러비드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부쳐졌을 때 그녀를 석방하기 위해 가장 힘쓴 사람 중 하 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앞에 나온 가너 부부와 달리 그는 개인으로 소유하는 흑인 노예도 없으면 세스 모녀와 채무관계도 없기에 그의 선행은 무조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공 격하고 심지어 잔인한 ‘학교 선생’과 착각한 세스의 행동이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덴버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보드윈 남매의 집에 갔을 때, 보드윈 집안에는 흑인의 형상을 한 저 금통이 있었다. 그 저금통은 동전 등을 넣는 쩍 벌린 빨간 입, 달처럼 툭 튀어나온 두 눈과 못대 가리를 성글게 꽂아놓은 머리카락이 전부인 흉측한 흑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그가 대외 적으로 흑인을 약자로 간주하여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도 사소한 일면에서 은연중으로 무시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보드윈이 백인-흑인 사회 내에서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스의 행동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스가 18년 전에는 백인으로부터 약자로서 공격을 받을 때, 마찬가지로 약자인 자신의 아이를 공격하였는데, 18년 후에는 강자인 백인을 공격했다는 점이다. 18년 전, 세스가 자신의 아이인 빌러비드를 공격한 것은 일종의 수평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수평 폭력은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프란츠 파농이 자신의 저서인 ‘검은 피부와 하얀 가면’에서 제시 한 사회 이론으로 “인간에게는 강자로부터 수직 폭력을 당할수록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수평 폭력 심리가 있다.” 위에 제시된 정의처럼 하류 계층이 상류 계층에게 쌓인 불만을 풀지 못하여 같은 하류 계층이나 더 낮은 계층의 사람과 갈등하거나 희생양 삼는 행위를 말한다.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사회적 약 자들과 갈등을 빚는 것이 최상위층 계층이 아닌 상위 계층 중 가장 낮은 계층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말이다. 계층끼리 갈등을 빚게 되는 근본적인 구조는 최상위층 기득권자들이 만 들어 놓았으며 이미 그 수혜를 모두 누렸지만, 상대적 하위-상위 계층들은 당장 자신들의 이익이 손해 보기 때문에 최하위 계층을 공격하는 것이다. 파농은 이런 점을 비판하면서 수평 폭력을 없 앨 수 있는 방법은 수직 폭력을 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야기한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과거 근본적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였거나, 수직 구조로 오는 폭력에 대항할 힘이 없어 자신보다 약 한 아기를 살해한 세스가 얼음송곳을 ‘학교 선생’(으로 오해한 에드워드 보드윈)에게 겨눈 것은, 백인에게 도움을 받아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던 세스가 베이비 석스의 “백인이 내 모든 것을 빼앗 아갔다.”라는 말을 듣고 드디어 기득권층을 파악하고 공격할 대상을 알아차려 수평 폭력에서 벗 어난 투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각에서 에드워드 보드윈은 보드윈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최상위 계층을 상징한다. 앞에 나타난 ‘선한 백인들’과 달리 ‘학교 선생과 그 제자들’은 ‘나쁜 백인 주인’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스위트홈에서 세스와 다른 노예들을 짐승 취급하고 식소를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 고 세스를 강간하여 세스와 세스의 남편인 할리를 큰 트라우마에 빠지게 한다. 그들은 전형적인 ‘악한 백인’이며 이들 전체를 작품 내에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중에서 현명한 노인으 로 그려지고, 앞에 나온 보드윈과 가너 부부에게 큰 은혜를 입은 베이비 석스는 학교 선생이 124 번지를 방문하고 참사가 일어난 이후 학교 선생 개인을 탓하는 게 아니라 세스나 덴버가 착한 백 인의 개인의 예시를 들어도, ‘백인들’ 전체를 원망하면서 “백인들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라고, 얘기한다. 즉, 작가는 베이비 석스의 입을 빌려 착한 백인 개개인을 그리면서도 그들이 완전히 무결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학교 선생’들은 다른 백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들과 비교되면서 그들의 위치를 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스가 ‘학교 선생과 그 제자들’에게 쫓겨 탈출을 감행할 때, 에이미 벤더는 학교 선생처럼 백인이기에 추적자의 모습으로 세스에게 잠깐 혼란을 주나, 오히려 세스와 같은 피추적자임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처지 가 백인이라기보다는 흑인 노예에 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가너 부인이 남편이 죽고 나서 스스로 ‘학교 선생’을 집 안에 들이고 그것에 안도를 느끼는 점에서 ‘착한 백인’이 모습을 띄었으나 남편이 죽고 압도적인 힘과 남성성의 부재에 결국 학교 선생으로 상징되는 기득권층의 폭력을 받아들임을 알 수 있다. 에드워드 보드윈은 아예 작중 내에서 세스에 의해 학교 선생 그 자체 와 동일시된다. 에드워드 보드윈이 백인 기득권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빌러비드>의 저자인 토니 모리슨은 선악 구조가 뻔한 노예제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백인들을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로 만들지 않았지만 작품의 현자 캐릭터 격에 해당하는 베이비의 석스의 입을 통하여 이 캐릭터들이 결국 같은 백인임을 얘기하고 ‘악한 백인’의 상징인 학교 선생을 일종의 장치로 이용하여, 백인 캐릭터 들과 학교 선생과의 관계성 비교를 통하여 그들이 완전히 무결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한 백인들이 취하는 선한 행동들은 전부 모종의 이유가 있으며 개인의 범주에서 넘어가 백인 전체 차원에서의 정당화로 확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참고 문헌 -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 나타난 탈식민적 정체성 추구>(2012), 현대영어영문학 제56권 4호, 박순정, -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것은 수평 폭력이 아니라 수직 폭력이다 _ 프란츠 파농(2018), 민중의 소리, 이완배 - [홍세화 칼럼] 혐오의 정치학(2019), 한겨레, 홍세화 -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자기 치유가 빚어낸 새로운 정체성(2015), 현대 영어영문학 제59권 2호, 이가성(성균관 대학교) - 빌러비드에서 나타나는 부름과 응답을 통한 재 기억의 과정과 흑인 치유의 가능성(2007), 조 현경, 이화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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